AI와 함께 일하면서 생긴 부작용이 하나 있다. 문서가 너무 쉽게 만들어진다.
회의록, 스펙, 분석 메모, 발표자료, 방향 전환 결정 노트. 한 프로젝트에 md 파일이 일흔 개까지 쌓였다.
문제는 양이 아니었다. 무엇이 살아 있고 무엇이 죽었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정리하려고 정리 문서를 만들면, 그 문서가 또 정리 대상이 된다.
보이면 알 줄 알았다
첫 시도는 시각화였다. 파일을 점으로, 문서 사이의 링크와 언급을 선으로 삼아 거미줄을 그렸다.
어디서도 참조되지 않는 문서와 모든 곳에서 참조되는 문서가 한눈에 드러났다. 구조가 보였고, 꽤 만족했다.
그런데 정작 정리를 하려고 열어보니 이상했다. 그래프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래서 이걸 지워도 되나에 대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며칠 쓰고 인정했다. 지도와 판단은 다른 일이다.
지도는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무엇을 버릴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버리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건 결국 하나하나 열어 읽어야 하는 일이었다.
시각화는 읽기를 대신해주지 못한다. 읽기의 순서를 정해줄 뿐이다.
판단에 필요한 것
방향을 틀었다. 그리는 대신 읽게 했다.
AI 에이전트가 모든 문서를 읽고 각각에 한 줄 요약과 역할, 그리고 유지할지 보관할지 합칠지에 대한 의견을 달게 했다. 화면에는 그 목록이 뜨고, 나는 문서마다 결정 버튼만 누른다.
다 누르면 결정 목록이 만들어지고, 그걸 다시 AI에게 넘기면 실제 파일 이동까지 이어진다.
이 방식으로 프로젝트 하나를 정리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아카이브 폴더 안에 있는데도 여전히 유효한 문서를 네 개 찾아낸 순간이었다.
사람이 해둔 폴더 정리는 이미 틀려 있었다. 정리는 그 시점의 판단이고, 시간이 지나면 판단도 낡는다. 폴더 구조는 과거의 생각이 굳어 있는 자리라는 걸 그때 알았다.
자주 보는 것의 값
기세를 몰아 개인 폴더와 회사 폴더의 스물일곱 개 프로젝트에 전부 돌렸다. 프로젝트마다 페이지를 만들고, 전체를 모아 보는 화면까지 만들었다.
곧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화면을 최신으로 유지하려면 매번 AI에게 다시 스캔을 시켜야 했다. 그냥 현황을 보고 싶을 뿐인데 볼 때마다 비용이 나갔다.
그래서 세 번째로 방향을 틀었다. 화면 전체를 로컬 서버로 옮겼다.
표준 라이브러리만으로 만든 작은 서버가 페이지를 열 때마다 두 폴더를 훑는다. 스물일곱 개 프로젝트를 훑는 데 0.5초. 새 프로젝트에 문서가 생기면 등록 절차 없이 나타난다.
역할이 정리됐다. 보는 것은 로컬이 한다. 읽고 판단 재료를 만드는 것은 AI가 한다. 결정을 실행하는 것도 AI가 한다.
여기서 가장 크게 배운 건 기술이 아니라 배치였다. 무엇을 자동화할 것인가보다, 비용이 드는 일을 어디에 둘 것인가가 도구의 수명을 결정한다.
매일 여는 화면이 매번 값을 요구하면 그 도구는 결국 열리지 않는다.
세 번 틀면서 생각한 것
지금 이 화면은 모니터 한쪽에 늘 떠 있다. 프로젝트를 열기 전에 문서 지도를 한 번 보고 들어가는 습관이 생겼고, 참조되지 않는 문서가 늘어나는 프로젝트는 슬슬 정리할 때라는 신호로 읽는다.
돌아보면 이 도구는 세 번의 이게 아닌데를 지나며 만들어졌다.
시각화가 아니라 판단할 목록이 필요했다는 것. 판단 재료는 결국 읽어야 나온다는 것. 그리고 자주 보는 것은 가까이 두어야 한다는 것.
처음 설계에서 정답을 맞히는 것보다 아니라는 걸 빨리 인정하는 편이 늘 빨랐다. 혼자 만드는 도구의 사치는 그걸 마음껏 할 수 있다는 데 있다.
문서를 정리하려고 만든 도구인데, 정작 정리된 것은 문서에 대한 내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