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소에서 주간 AI 활용 세미나를 열기로 했고, 우리 팀이 발표를 맡았다.
준비하면서 걱정이 하나 있었다.
"AI로 개발한다"는 말이 "대충 만든다"로 읽히면 어떡하지.
빠르게 만들었다는 게 곧 대충 만들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어디에나 조금씩은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은 슬라이드에 좋은 말을 아무리 써도 안 바뀔 것 같았다.
"AI로 개발해도 품질이 좋습니다"라고 PPT에 쓰는 건, 그냥 주장이니까.
그래서 방식을 바꿨다.
발표 자료 자체를 증거로 만들기로 했다.
매체가 메시지다
PPT를 만드는 대신, 웹 슬라이드 데크를 직접 만들어서 브라우저로 발표했다.
키보드 화살표와 스페이스로 넘기고, 터치로 스와이프하고, 슬라이드가 애니메이션으로 전환되고, 차트가 등장하면서 숫자가 카운트업된다.
발표를 시작하면서 이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지금 보고 계신 이 자료도 AI와 함께 만들었습니다. 며칠 걸렸습니다."
이게 슬라이드 열 장보다 강했다.
"빠르게 만들어도 품질이 좋다"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눈앞에서 돌아가고 있으니까.
이게 이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내용을 잘 쓰는 것보다 형식으로 증명하는 것을 골랐다는 것.
왜 슬라이드 라이브러리를 안 썼나
웹 슬라이드를 만드는 도구는 이미 좋은 게 여럿 있다.
그런데 안 썼다. 슬라이드 엔진을 직접 만들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① 그걸 만드는 게 곧 메시지였다. 라이브러리를 쓰면 "라이브러리를 잘 골랐다"가 되고, 직접 만들면 "이걸 만들 수 있다"가 된다. 발표 주제가 개발 역량과 속도인데 남의 엔진을 쓰면 앞뒤가 안 맞았다.
② 필요한 게 많지 않았다. 키보드 이동, 터치 스와이프, 하단 도트, 진행바. 이 네 개뿐이다. 이 정도를 위해 범용 프레임워크의 설정과 제약을 떠안을 이유가 없었다.
필요한 게 적을 때는 직접 만드는 게 더 싸다는 건 자주 잊게 되는 사실이다.
의존성은 애니메이션 라이브러리 하나만 썼다.
차트도 라이브러리 대신 SVG를 직접 그리고 모션을 얹었다. 차트 라이브러리를 쓰면 어디서 본 듯한 그래프가 나오는데, 직접 그리면 이 발표에만 있는 그림이 나온다.
발표 자료에서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핵심 메시지를 먼저 못 박았다
슬라이드를 만들기 전에 문서를 하나 썼다. "이 발표에서 절대 잃으면 안 되는 것"을 적은 문서다.
1. "AI로 대충 빨리"가 아니라 "정석을 빠르게"
예전에는 시간이 없어서 생략하던 것들이 있었다. 테스트, 문서, 디자인 시스템, CI. 지금은 그걸 기본으로 켜고도 빠르다.
2. AI는 바닥을 낮추는 게 아니라 천장을 높인다
사람이 하는 일이 타이핑에서 설계·검증·품질 게이트로 옮겨간다. 낮은 수준의 결과물이 쉬워진 게 아니라, 높은 수준의 결과물이 가능해진 것.
3. 레버리지
한 사람이 커버하는 범위가 넓어지고, 그게 팀 전체의 성숙도를 올린다.
4. 계약에서 생성한다
기획에서 디자인 토큰으로, 스펙에서 타입으로. 손으로 베끼는 것보다 정합성이 높고 휴먼에러가 적다.
5. 맹신하지 않는다
한계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사람이 검증하고 가드레일을 친다.
이 다섯 개를 먼저 적어두니, 슬라이드를 만들다가 곁길로 새려고 할 때마다 돌아올 기준이 있었다.
발표 자료를 만들기 전에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까지 정해두는 게 도움이 됐다.
특히 5번이 중요했다. 한계를 솔직하게 말하는 슬라이드를 넣은 뒤로 나머지 주장의 신뢰도가 올라갔다.
장점만 말하는 발표는 안 믿기니까.
청중이 두 층이었다
이게 준비하면서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다.
세미나에는 경영진도 오고 실무자도 온다. 두 집단이 듣고 싶은 게 다르다.
- 경영진: 왜 하는가, 얼마나 이득인가, 리스크는 무엇인가, 확장 가능한가
- 실무자: 어떻게 하는가, 어떤 도구를 어떻게 쓰는가
한 발표에 둘 다 넣으면 양쪽 다 지루해진다.
그래서 층을 순서로 나눴다.
앞부분은 경영진의 언어로 — 왜 하는지, 무엇이 좋아졌는지, 어떤 가드레일이 있는지.
중반부터는 실무 플로우로 — 기획에서 디자인, 구현, 검증, 배포까지 각 단계에서 어떤 도구를 어떻게 쓰는지.
그리고 더 깊은 내용은 팝업으로 뺐다. 관심 있는 사람이 눌러서 보게.
발표 흐름은 짧게 유지하고, 깊이는 선택적으로 열리게 하는 구조다.
이게 웹 데크라서 가능했다. PPT였다면 부록 슬라이드 스무 장을 뒤에 붙이고 "관심 있으신 분은 나중에 보세요"라고 했을 것이다.
형식을 바꾸니 구성의 선택지가 늘었다.
결과보다 남은 것
발표가 어땠는지보다 이 과정에서 배운 게 더 오래 남았다.
형식이 곧 주장일 때가 있다. 무언가를 빠르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으면, 그 주장을 담은 자료를 빠르게 만들어서 보여주는 게 제일 짧은 경로다.
한계를 말해야 나머지가 믿긴다. 이건 발표뿐 아니라 문서·리뷰·보고 전부에 적용되는 것 같다.
필요한 게 적으면 직접 만드는 게 싸다. 도구를 고르는 데 쓸 시간에 만들면 끝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다.
그리고 하나 더.
이 데크는 만들어두면 계속 쓸 수 있는 자산이 됐다. 정적 파일로 빌드해두면 어디서든 열린다.
발표가 끝나고도 남는 자료를 만든 셈인데, 이건 예상하지 못한 이득이었다.